2장 어제는 집에 도착했을 때쯤 피어올랐던 저녁놀이, 오늘은 벌써 하늘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소녀의 부탁대로,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고선 횡단보도에 서서는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아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낯간지러움이 누군가와 손을 맞잡고 나란히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내 얼굴을 간질였다. 내가 누군가와 손을 맞잡고 걸어 다녔던 적이 있었던가? 글쎄, 잘 모르겠다. 나: “저기…… 유령도 배가 고프다고 했었지?” 소녀: “…… 네.” 나의 손을 잡고 있던 소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녀 역시 충동적으로 손을 잡아달라 부탁했던 것이 꽤나 낯간지럽게 느껴졌는지, 테루테루인형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 “그럼 집에 가서는 저녁 식사부터 준비해야겠다.” 어색한 티를 내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준비라고 해봤자, 냉장고에 남아있는 것들을 데워내는 것 정도겠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모여 있던 횡단보도를 건너고,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들어섰음에도 소녀의 시선은 여전히 테루테루인형에 고정된 채였다. 하지만 나의 손을 놓기는 싫었는지, 나의 손을 잡고 있는 소녀의 손에는 묘하게 힘이 실려 있었다. 미묘하디 미묘한 감각이, 나의 손을 타고 전해진다. 나: “저녁은 혹시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소녀: “아무거나 괜찮아요.” 나: “아, 으응…….” 평범한 대답이 들려오고, 소녀는 품에 안고 있던 테루테루인형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끌어안은 인형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소녀의 무덤덤한 얼굴과 겹쳤지만, 어울리는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소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오컬트부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는 것이었다. 나: “다른 사람은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소녀: “그런가요.” 소녀를 침대에 안내하고선, 부엌에서 먹을 걸 준비해오려는데 등 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 “…… 오컬트부실이랑 비슷한 분위기네요.” 나: “으응……?” 소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나 봐요.” 소녀는 방의 분위기가 신기하다는 듯 내게 말을 건넸다. 나: “어떤 분위기?” 소녀: “으스스한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나: “어어…….” 소녀: “귀신이 나와도 전혀 안 이상할 것 같은 분위기예요.” 조곤조곤하게 방을 둘러본 감상을 말하는 소녀였다. 악의가 깃든 것 같이 들리진 않았지만, 진심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오히려 나를 더 쓰라리게 하는 점이었다. 나: “…… 저녁 준비해올게.” 그렇다. 고교생 홀로 1년 넘게 자취를 한 장소에 남는 것은 필시 으스스함뿐이리라.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종종 청소하라는 잔소리와 함께 방구석에서 귀신 튀어나오겠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었는데. 이렇게 진짜 집에 귀신이 들린 걸 알면 어떤 반응이실까. 나: “미안. 냉장고에 남아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네.” 전자레인지에 데운 새우맛 필라프가 소녀의 앞에 놓이고, 나는 머쓱한 얼굴로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소녀: “괜찮아요. 잘 먹겠습니다.” 나: “으응…….”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 소녀는 젓가락을 들어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재깍재깍, 젓가락질하는 소리만이 공부방 겸 침실을 메운다. 혼자서 저녁 식사를 하는 것과 다름없이 느껴질 정도의 침묵이 식탁을 맴돈다. 전자레인지에 데워낸 찰기 없는 필라프가 소녀의 젓가락에서 자꾸만 흘러내리는 모습이 내가 소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목이 살짝 메어왔다. 새우맛 필라프가 퍼석퍼석한 것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나: “그러고 보니, 평소에 식사는 어떻게 해결했어?” 소녀: “…… 대충요.”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는 듯, 소녀는 젓가락을 입에 가져댔다. 음울해 보이기만 하던 소녀의 얼굴에서는, 아주 살짝이지만 편안함이 느껴졌다. 소녀: “따뜻한 음식은 오랜만이었어요. 잘 먹었습니다.” 마지막 젓가락질을 끝낸 소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녀의 접시는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접시를 정리하려는데, 소녀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소녀: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나: “아, 아냐. 손님이잖아. 피곤하기도 했을 거고. 침대에서 쉬고 있는 게…….” 소녀: “앞으로도 신세 질 테니까요.” 나에게서 접시를 뺏어 든 소녀는 그대로 부엌으로 향했다. 급히 소녀를 막아서려 했지만, 이미 그녀는 부엌으로 발걸음을 내디딘 뒤였다. 싱크대에 잔뜩 쌓여 있는 접시들을 한 번, 그리고 그녀를 따라온 나를 한 번 바라보는 소녀. 이번에도 악의는 없을 테지만, 소녀의 공허한 시선이 나를 마구 찔러댔다. 나: “아…… 며칠 동안 좀 바빠서…….” 소녀: “괜찮아요.” 소녀는 두어 번 정도 눈을 끔뻑이더니, 물을 틀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나: “도와줄까?” 소녀: “할 일 하세요. 앞으로 이런 일은 제가 할 테니까.” 제법 능숙해 보이는 손놀림으로, 소녀는 접시를 씻어냈다. 살아있었을 적엔 중학생 정도였을 유령 소녀는, 어째서인지 자취 1년 차인 나보다도 집안일이 익숙해 보였다. 나: “익숙해 보이네.” 소녀: “…… 그러게요.” 소녀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컴퓨터를 켜고선 태블릿을 연결했다. 챙겨온 자료들을 책상 위에 펼쳐두고는, 눈동자를 굴리며 적혀 있는 것들을 훑어본다. 흔하디 흔한 귀신 이야기들……. 소녀: “아까 거기서 가져온 자료들인가요?” 나: “와앗, 깜짝이야.” 데스크탑에 옮겨진 자료들을 살펴보려는데, 인기척도 없이 나의 옆에 나타난 소녀가 모니터 화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건, 그녀가 귀신이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나는 화면을 위아래로 훑으면서 자료의 양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나: “으응, 맞아. 아까 가져온 자료들.” 의심 가는 기간 동안 일어났던 사망 사고는 총 열여덟 건. 내가 알지 못한 사이 백석시의 외곽지역에서는 제법 빈번하게 이런 사고가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이 사건 중에 소녀와 연관된 것이 있는 걸까? 나는 그중에서도 일단 맨 위에 정렬되어 있던 사건 폴더를 열어 보았다. 소녀: “살인 사건이네요.” 나: “어…… 응. 그렇네.” 옆에서 들려온 소녀의 목소리에, 나는 꺼림칙한 투를 애써 숨기며 대답했다. 작년 겨울, E구역에서 일어났던 살인 사건. 그러고 보니 이 사건, 인터넷 뉴스에서도 무척이나 비중 있게 다뤘었지. 내용을 대충 훑던 나는 소녀의 눈치를 살피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려다 말고 커서를 멈췄다. 나: “으음…… 그렇게 부담스레 볼 것까진……. 혹시 뭔가 떠오르기라도 한 거야?” 소녀: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사래를 치는 소녀. 소녀는 사건 파일을 괜히 내가 부담스러워질 정도로 빤히 읽고 있던 듯했다. 하긴, 이렇게나 끔찍한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면 죽어서도 억울함에 못 이겨 귀신이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처음부터 이렇게 무거운 생각에 얽매이기는 싫은데 말이다. 나: “…….” 범행 동기도, 범인이 누구인지도 아직 알아내지 못한 일종의 미제 사건. 일단은 이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 뒤로 미루고 싶어서인지, 나는 소녀가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는 동안 다음 자료로 페이지를 넘겼다. 두 번째 자료의 내용은 B구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작년 겨울에 일어난 화재 사고였다. 나: “혹시 이건 생각나는 거 있어?” 잠깐 고민을 해보려는 듯했지만, 소녀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소녀: “아뇨. 아무것도요.” 스크롤을 내리며, 나는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소녀가 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어서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이 자료만으로는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역부족인 건지는 확실하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이를 받아들이면 좋은 걸까. 고민에 빠져 있던 나의 머릿속에, 문득 괜찮은 방법 하나가 떠올랐다. 나: “아, 맞다. 혹시 그 방법이라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겠다.” 소녀: “어떤 방법 말인가요?” 나: “이거, VR 헤드셋이라는 건데. 이걸 사용해서 자료에 나온 장소를 살펴보는 게 어떨까 해서.” 가져온 자료에 저장되어 있던 데이터 중에는 가상현실과 커넥팅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이를 이용해 직접 사건 당일의 현장을 살펴본다면, 어쩌면 소녀의 잃어버린 기억이 반응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게서 VR 헤드셋을 받아든 소녀는 나와 헤드셋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소녀는 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모르는 듯했다. 나는 소녀의 머리에 헤드셋을 직접 씌워 주었다. 나: “자, 이렇게 끼면 돼.” 소녀: “…… 많이 어색하네요.” 나: “어때? 걸어 다니면서 혹시 기억나는 게 있으면 이야기해줘.” 소녀는 헤드셋을 낀 채 주변을 둘러보다 말고,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우두커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던 소녀는 헤드셋을 만지작거리더니, 내게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소녀: “…… 아무것도 안 보여요.” 소녀에게서 헤드셋을 빼내고는, 이번엔 내가 헤드셋을 써보았다. 정말 소녀의 말대로, 눈앞에는 가상현실 대신 노이즈 섞인 화면만이 보일 뿐이었다. 나: “어라, 갑자기 고장이라도 났나. 왜 이렇지.” 소녀: “제가 유령이라 저를 이 기계가 인식하지 못한 게 아닐까요?” 나: “으음…… 역시 그런가.” 아마 헤드셋이 유령인 소녀의 홍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하는 수밖엔 없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유령인 소녀에게 VR 헤드셋을 씌워 보려 했던 내가 바보였던 건 아닐까. 그 찰나의 순간 동안 소녀가 유령이라는 사실을 잠깐 망각했던 것이리라. 헤드셋은 몇 분 정도 더 노이즈 섞인 화면을 송출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제 기능을 되찾긴 했지만 말이다. 그 뒤로 소녀와 함께 열여덟 건의 자료들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소녀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나: “흐음…… 그러면 역시 직접 찾아보는 방법 말고는 없는 건가.” 소녀: “아마도요.” 나: “도시 외곽지역이라 좀 그렇긴 한데. 어때? 괜찮겠어?” 소녀: “마음대로요. 이야기했던 곳은 언제쯤 찾아갈 건가요?” 나: “곧 방학식이니까, 방학 시작하면 바로 찾아가 보는 걸로. 그런데 말야…… 정말 괜찮겠어?” 소녀: “전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잃을 것도 없는 유령이니까요.” 나: “아, 으응…….” 마음에 걸리는 건, 아무래도 그 점이었다. 아주 만약, 아주 만약이지만, 소녀가 애써 잊고 있던 끔찍한 장면을 떠올리게 되는 건 아닐까. 내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소녀는 나의 생각을 정말로 읽어내기라도 한 듯 말을 꺼냈다. 소녀: “혹시나 상처 줄까 봐 걱정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 전 괜찮으니까, 이미 상처는 잔뜩 입었으니까요.” 소녀: “그리고, 이 일의 궁극적인 목표는 유령인 저를 없애는 거잖아요. 결국엔 사라져야 할 존재를 걱정하는 건, 소용없는 일이에요.” 소녀의 목소리에는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것처럼 차가움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소녀와 나 사이에는 잠깐 침묵이 흐르고, 마우스가 딸깍이는 소리가 침묵의 간격을 메운다. 나는 백석시 외곽지역의 지도를 확인하며, 우리가 가봐야 할 장소들을 정리해보았다. 그나저나, 아직까지 복구가 덜 된 백석시의 외곽지역은 치안이나 건물 상태 같은 것들이 영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긴 한데. 그래서 대부분의 안타까운 사고들이 그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나: ‘…… 살인 사건.’ 사건이 일어난 장소들을 다시 확인해 보며, 나는 턱을 괴고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었으니까. 끔찍한 사건들투성이였다. 살인 사건이든, 교통사고든, 아니, 이 중에서 끔찍하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오히려 사건 장면을 떠올려 버린 소녀가 더 괴로워하기만 하는 건 아니려나. 아까 전, 오컬트부실에서 보았던 것처럼― 나: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아까 오컬트부실에서 있었던 일 말인데.” 나의 목소리가 꽤나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던 침묵을 밀어낸다. 대답 대신, 소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 “왜 그렇게 놀랐던 거야?” 확실히, 소녀는 나의 물음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자신을 신경 쓰지 말라던 방금과는 사뭇 다른 머뭇거림이, 소녀에게서 느껴졌다. 소녀: “봤어요.” 짤막한 대답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 짧은 대답 속에서도 떨림이 느껴지는 건, 순전히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소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소녀: “죽음을요.” 나: “으응, 그렇긴 하지만…… 그 전에 사거리에서 다른 아저씨를 봤을 땐 그렇게까지 격한 반응은 아니었잖아.” 소녀: “그건…….” 떨리고 있었다. 소녀의 목소리도, 눈동자도, 어깨도. 소녀: “끔찍한 색이었어요.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색? 소녀: “웁, 우으윽…….” 이야기를 꺼내다 말고,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버린 소녀는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헛구역질을 끝낸 뒤에도, 소녀는 그때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연신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나: “미안. 내가 괜한 걸 물어봤네.” 소녀: “…… 아니에요. 제가 과민 반응한 거니까…….” 급히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소녀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얼굴로 괜찮다는 이야기만을 반복했다. 나: “그런데 말이야.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죽음의 색이라는 게 뭐야?” 소녀: “말 그대로예요. 죽음의 장면이, 색으로 보이는 거죠.” 나: “막…… 빨간색이나, 그런 색으로?” 소녀: “…… 아뇨.” 숨을 한 번 고른 소녀는, 내게 죽음의 색이란 무엇인지 설명을 해주었다. 소녀: “사람이 평범하게는 볼 수 없는 색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가시광선이라고 하던가요? 여하튼, 그런 색과는 다른 빛이에요. 아, 이렇게 이야기하니 색이 아니라 빛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겠네요.” 나: “그럼, 네가 일으키는 반응은 특이한 색의 빛을 본 뒤에 나타나는 광발작 같은 건가?” 소녀: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요.” 소녀는 자신 없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하긴, 오컬트 현상에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게 어디 있을까. 그 뒤로는 비슷한 질문과 대답의 연속이었다. 내가 뭔가를 찾아 소녀에게 보여주며, 혹시 기억나는 게 있냐고 물으면 소녀가 “아뇨”라며 고개를 젓는 비슷한 패턴의 반복. 슬슬 졸음이 오는지, 나는 스크롤을 내리다 그만 참지 못하고 조그맣게 하품을 했다. 소녀: “피곤하면 무리하진 않아도 돼요. 벌써 시간도 이렇게 됐고…….” 나: “아, 아냐. 평소에도 이때쯤 자니까.”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어간 뒤였다. 나: “어차피 요즘은 학교에서 하는 것도 별로 없거든.” 소녀: “그런가요.” 나의 말에 그녀다운 짤막한 대답을 건넨 소녀가 눈을 깜박였다. 화면을 바라보는 소녀도 슬슬 피곤해 보이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나: “너도 피곤하면 저기 침대에서 자면 돼.” 소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힐긋 바라보았다. 나는 소녀의 시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곧장 눈치챌 수 있었다. 나: “나는 바닥에서 이불 깔고 자면 되니까…….” 소녀: “귀신한테 너무 많은 호의를 베푸는 거 아닌가요.” 다시금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며, 소녀는 정말 그래도 괜찮겠냐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나: “귀신이라 해도, 너무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서 잘 모르겠는걸.” 소녀: “하지만 사라져야 할 존재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에요.” 소녀는 경계선을 치려는 것만 같은 투로, 딱 잘라 말했다. 소녀: “전 괜찮아요. 낮에 깜빡 졸기도 했고, 평소에도 잠은 많이 안 잤으니까요.” 나: “아, 맞다. 그랬었지.” 낮에 오컬트부실에서 보았던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소녀의 모습이 얼핏 떠오른다. 소녀와 함께 지내다 보면, 그런 무방비한 모습을 볼 기회가 더 생기는 걸까. 소녀: “전 여기 있는 자료들이나 더 찾아보고 있을 테니까, 먼저 자는 게…….” 나: “으응……? 아, 아냐. 너도 피곤할 텐데, 더 찾아보는 건 다음에 하는 걸로 하자.” 소녀: “저는 괜찮아요.” 나: “그래도 첫날부터 무리하는 건 좋지 않다고.” 나는 컴퓨터 전원을 끄고는 소녀를 침대로 안내했다. 소녀는 새까맣게 변한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눈을 두어 번 깜빡이긴 했지만, 이내 내 말을 따라 침대로 향했다. 나: “불 끌게. 아침에 봐.” 소녀: “…… 네.” 침대로 향하고 나서도, 소녀와 나 사이에서는 내가 어디서 자야 하는지 이야기가 오갔다. 결국 내가 바닥에서 이부자리를 펴고, 소녀가 침대에서 자는 걸로 결론이 났지만 말이다. 소녀는 여전히 잠을 잘 생각은 없었는지, 무릎을 껴안은 채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아 바닥에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을 껐지만, 어둠 속에서는 소녀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몸을 비틀어 소녀의 시선을 슬쩍 피해 보려다 말고,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소녀에게 말했다. 나: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 소녀: “제 이름은 저도 모르는걸요.” 나: “그래도 내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소녀: “이름 정도는…… 그렇네요.” 나: “내 이름…….” 잠시, 천장을 응시하던 눈동자를 깜빡인다. 나의 이름을 들은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이 자동적으로 차단되어 수면 모드로 들어간 새까만 방에, 묘한 침묵이 흐른다. 어둠 속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넌지시 들려온다. 소녀: “저는 제 이름을 기억해 낼 수 있을까요?” 나: “이제부터 찾아보려 하는 거니까.” 소녀: “꼭 알아내고 싶네요.” 나: “으응……?” 소녀: “혼자서만 이름을 알고 있으려니까, 빚을 지고 있는 것 같아서요.” 어둠 속에서 형체 없이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공허하게만 느껴진다. 소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이름 정도는 괜찮겠죠.” 나는 몸을 한 번 뒤척이고선, 눈을 감았다. 소녀는 여전히 쪼그려 앉아있는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부스스 눈을 뜬 건 시간을 알 수 없는 새벽 어느 순간의 일이었다. 나: ‘목말라…….’ 비몽사몽하며 몸을 일으킨 나는 냉장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을 한 컵 마신 뒤 이부자리로 돌아오려는데, 이불 옆에 쪼그린 채 잠들어 있는 소녀의 모습이 내 발걸음을 멈춰 서게 했다. 침대에서 내려온 건가? 침대가 더 편할 텐데, 굳이 왜 바닥에……. 나: “…….” 다소 익숙한 소녀의 모습에서, 나는 그녀가 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입술을 깨문 채, 딱딱하게 굳어 있는 소녀의 얼굴에서는, 미묘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소녀는 악몽을 꾸고 있는 듯했다. 유령도 꿈을 꾸는구나. 나는 슬며시 소녀의 옆으로 다가가서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 “저기, 괜찮아?” 소녀: “…….” 소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여전히 악몽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소녀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리자, 그녀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쏟아져 나온다. 나: “아…… 미안. 괜찮아……?” 아주 잠깐 소녀에게 닿았던 손을 떼고선, 소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소녀는 산만하게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던 소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나를 향한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달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 “목이 말라서 깼는데, 혹시 악몽이라도 꾸나 해서.” 소녀: “…… 으으.” 미간을 세게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뜨는 소녀. 소녀의 눈동자는 방금 꾸었던 악몽이 묻어있는 것처럼 탁해 보였다. 나: “물이라도 한잔 갖다줄까?” 소녀: “…… 부탁해요.” 내가 갖다준 물 한 컵을 두어 번에 걸쳐 비운 소녀는 다시금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소녀는 이번에도 잠에 들고 싶은 생각은 없어 보였다. 침대로 자리를 옮겨 쪼그려 앉아있던 소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숨을 내쉰 나는 침실의 전등을 조금 더 짙은 밝기로 조절했다. 소녀: “…… 안 잘 건가요?” 태블릿을 꺼내든 나를, 소녀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나: “나도 잠이 다 깨버렸으니까. 어차피 두어 시간 뒤면 학교도 가야 하고, 여차하면 학교에서 자면 되거든.” 소녀: “불량학생이네요.” 나: “아냐, 그런 거. 곧 방학이라 다들 학교에선 엄청 루즈하다고.” 소녀: “…… 그런가요.” 태블릿을 켠 내가 하는 일은, 아까 전 자정의 연장선이다. 소녀: “그건 뭔가요?” 나: “같이 볼래?” 소녀: “잠도 깼으니까…… 그러죠.” 나를 기웃기웃 바라보던 소녀는 그제야 웅크려 있던 몸을 피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두어 시간 동안, 나와 소녀는 이런저런 도시 괴담을 읽으며 잡담을 나눴다. 보통 이야기를 꺼내는 쪽은 나였고, 소녀는 짤막한 반응을 보이는 쪽이었지만. 소녀는 그녀의 말버릇처럼 그거면 된 건지,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보다는 훨씬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덧 방에 들어오는 햇살과 태블릿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가 아침이 시작됨을 알린다. 나: “이제 학교 갈 준비해야겠다.” 곧바로 알람을 해제한 나는 욕실 쪽으로 향하며 소녀를 힐긋 바라보았다. 문득 궁금한 점이 생기긴 했는데, 역시 이런 건 안 물어보는 게 좋겠지. 나: “씻고 나와서 아침 먹을 거니까, 잠깐만 기다려 줘.” 욕실 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침대 커버에 소녀의 몸이 닿는 소리가 겹쳐 들려온다. 조용조용히 움직일 땐 전혀 느껴지지 않던 소녀의 인기척이었지만, 이번엔 또렷이 들렸다. 아침이라 긴장이 다 풀린 걸까. 침대에서 뒹굴고 있을 소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관한 상상.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나의 몸을 통과하지 못하고 욕조로 떨어진다. 방금 전, 내가 떠올린 궁금한 점이란 바로 그것이었다. 나: ‘유령도 샤워를 할 수 있을까?’ 나: “…….” 쓸데없는 고민이다. 물어보는 것도 분명 실례겠지. 내일이 방학식이라 그런가, 평소에는 반쯤 눈을 감은 채 마무리됐던 아침 샤워도 오늘은 개운하게 끝이 났다. 어쩌면 다른 이유일지도 모르겠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내가 아침 식사랍시고 테이블에 차려낸 음식은 다른 게 아닌 토스트와 땅콩버터 잼이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던 아침 식사였지만, 누군가와 함께한다고 하니 이렇게 칙칙할 수가 없었다. 소녀는 내가 건네준 잼이 발린 식빵을 조용히 우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미안할 정도로 조용히, 인기척조차 내지 않으며 말이다. 나: “아침엔 입맛에 맞는 게 이런 것뿐이라…… 미안.” 소녀: “아녜요.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니까요.” 조용히 식빵을 우물거리던 소녀는 나의 말에 한결같은 반응만을 보였다. 소녀의 말이 온전히 진실로만 이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녀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녀: “아침은 항상 이런 식인가요?” 나: “으응, 뭐…… 그렇지.” 소녀: “…… 그런가요.” 고개를 힐긋 돌려 바라본 창밖에는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오늘도 보나 마나 폭염이겠지. 식사를 끝내고선, 접시를 정리하려는 나를 소녀가 다시 제지했다. 멋쩍은 한숨을 조금은 큰 소리로 내쉬고는, 결국 나는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나: “그럼, 그동안은 뭐하면서 있을 거야?” 소녀: “글쎄요. 아마 빈둥대고 있지 않을까요?” 나: “밖엔 안 나갈 거지?” 소녀: “아마도요.” 나: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도어락 비밀번호는―” 소녀: “안 알려줘도 괜찮아요. 어차피 현관 도어락은 제 손을 인식 못 하니까요.” 나: “아, 그렇구나.” 여러모로 기계 문명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유령 소녀였다. 반나절 정도를 집에서 혼자 별달리 하는 것도 없이 있으려면 아무래도 심심하지 않을까. 집에 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게임기로 쓰던 VR 헤드셋이 있긴 하지만 소녀가 게임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애초에 VR 헤드셋이 소녀에겐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도 딱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내일은 방학식이니까……. 나: “갔다 올게. 언제 돌아올지는 잘 모르겠다. 늦을 수도 있어.” 소녀: “괜찮아요.” 나: “에어컨 온도는 24도로 맞춰 놓고 갈게. 혹시 추우면 이걸로 조절해.” 소녀: “알겠어요.” 필요 이상의 대답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건지, 소녀의 대답은 짤막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와는 달리 소녀의 목소리에 묻어있던 차가움은 어제에 비해 많이 지워지긴 했지만 말이다. 현관을 나서자 예상했던 무더위가 나를 덮쳤다. 내일이 방학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이번 여름은 제법이나 힘든 계절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실에 들어오면, 늘 그랬듯 나를 맞이해주는 한 사람이 있다. 달콤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그녀의 인사가 하루의 또다른 시작을 알린다. 유미: “좋은 아침~” 캐비닛에서 태블릿을 꺼내고선 자리에 앉는 내게 인사를 건네는 유미에게, 나 역시 손을 흔들어 보인다. 유미: “그건 생각해 봤어?” 나: “생각? 어떤 거?” 유미: “방학 때 같이 봉사활동 가자고 한 거. 뭐야, 내일이 방학식인데 생각 안 하고 있었던 거야?” 나: “아, 아니. 생각은 해봤는데.” 실은 어젯밤에 떠올렸어야 하는 건데, 떠올리지 못했다. 나: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유미: “왜? 방학 때 생각해 둔 다른 일은 없다고 하지 않았어?” 나: “갑자기 동아리에서 해야 할 일이 생겨서.” 유미: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만…….” 아쉽다는 듯한 표정으로, 유미는 말했다. 유미: “그럼 방학 땐 자주 못 만나겠네.” 나: “으응, 그렇겠다.” 유미: “그럼, 우리 오늘 학교 마치면 같이 영화라도 안 보러 갈래?” 나: “영화? 보고 싶은 거라도 있어?” 유미: “콕 찍어서 보고 싶은 건 없어도, 왠지 영화 보고 싶은 날인걸?” 유미의 제안에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 이유라면 당연히 집에 혼자 있을 유령 소녀 때문이겠지만. 유미: “뭐야, 학교 마치고 다른 일이라도 있는 거야?” 나: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유미는 나의 반응과 반응 사이에 생겨난 틈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유미: “숨겨둔 여자 친구라도 있는 거야?” 나: “아니거든.” 유미: “킥, 농담이야, 농담. 뭘 그리 까칠하게 대답해~” 아무래도 어제 현지가 유미에게 상황을 잘 꾸며내 전달해 준 모양이었다. 유미의 말에는 확실히 농담조라는 투가 묻어있었으니까. 뭐라고 설명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영화 한 편 정도는……. 괜찮겠지? 유미: “그래서, 영화 볼 거야, 말 거야?” 나: “알겠어, 학교 마치고 같이 영화 보러 가자.” 곧이어 들려온 유미의 “예이―”하는 과도한 반응에 주변의 시선이 쏠려버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유미: “영화는 뭘로 볼까? 이거? 아님 저거? 다 재밌어 보이는데…….” 나: “난 아무거나 괜찮은데…….” 유미: “야, 그러면 영화 고르는 재미가 없잖아. 네가 골라 봐.” 학교가 끝나고, 나와 유미는 정말로 영화관에 도착해 어떤 영화를 볼지 이야기를 나누며 상영 시간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저거 어때?” 유미: “며칠 전에 새로 나온 영화네. 저런 영화 좋아했었어?” 나: “음…… 특별히 좋아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재밌어 보이는데.” 유미: “그럼, 저걸로 하자.” 곧바로 티켓 발매대로 발걸음을 옮기는 유미. 유미: “영화 티켓은 내가 살 테니까, 팝콘이랑 콜라는 네가 사는 걸로!”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다이어트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착각이라기엔 너무 생생한 어제의 기억이었습니다만……. 나: “으응, 알겠어. 팝콘은 무슨 맛으로 할까?” 유미: “그거야 당연히 카라멜 맛이지~. 익숙한 역할 분담이 이어진다. 유미와 함께 영화관에 오는 건 제법 자주 있는 일이었으니까. 티켓을 끊는 데도, 간식거리를 사는 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이제 막 학교가 끝날 때라 그런지, 영화관은 한산한 편이었다. 나: “여기, 팝콘이랑 콜라.” 유미: “상영관은 3층 F관이래. 10분 뒤에 시작한다니까, 천천히 올라가자.” 양손에 팝콘과 콜라를 나눠든 우리는 느긋이 상영관으로 향했다. 아직 영화가 시작하지 않은 상영관에는 요즘 유행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음 왔을 땐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다른 영화관의 모든 것들이 신기할 따름이었지만, 이젠 당연하다는 듯 티켓에 적힌 좌석에 앉을 뿐이었다. 나: “그나저나, 갑자기 왜 영화관이야.” 자리에 앉아 상영관 한가운데의 무대를 바라보며, 나는 유미에게 물었다. 유미: “그야 당연히 영화 보고 싶은 날이라 그런 거지. 그렇다고 영화관에 혼자 오는 건 좀 그렇잖아.” 나: “밤에 가족이랑 같이 오면 되지 않아?” 유미: “가족이랑 영화관에 오면 부모님이 몸에 안 좋다고 팝콘 같은 건 안 사줘서 싫단 말이야.” 알듯 말듯한 투로 나의 의문에 대답을 건네고는, 유미는 팝콘을 집어 우물거렸다. 곧이어 희미하게 켜져 있던 상영관의 조명이 꺼지고, 어렴풋이 원형의 틀을 갖춘 무대에서 영화가 시작됐다. 스크린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영화관에서 사용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듯, 상영관 전체는 영화의 배경이 되고, 무대에는 배우가 직접 연기하듯 홀로그램이 솟아 오른다. 마치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홀로그램은 관객의 눈을 의식하지 못하고는 영화를 진행해 간다. 관객들은 영화관에서 아주 잠시, 유령이 된다. 하나. 사람을 죽여버렸다. 둘.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 셋. 사람을 죽인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다. 범죄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범죄임과 동시에, 단죄이기도 하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이를 죽여버린 그들을 향한 복수. 이제 마지막, 마지막 걸음만 내딛으면 끝이다. 그는 이런 모습의 나라도 사랑해 줄 수 있을까? 그는 이런 모습의 나라도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익명: “…….” 일순간, 내뱉은 숨결에 묻어난 감정들이 나를 붙잡는다. 광기는 붉은색. 그리고 나는 붉은색으로 물든다.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광기 속에서, 나는 몸을 떨고, 눈물을 흘린다. 붉은색의 눈물이 나를 감싼다. 갈 곳을 잃은 광기에 휩싸여, 나의 몸이 무너져 내린다. 정신이 흐릿해진다. 붉은색으로 물든 모든 것들이 흐릿해진다. 몸도, 정신도, 세상도……. 영화가 끝나고, 무대가 막을 내린다. 다시금 옅은 조명이 출입구를 비추고, 사람들이 하나둘 상영관을 빠져 나가기 시작한다. 나와 유미도 빈 팝콘 트레이와 콜라 컵을 손에 쥐고는 상영관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 “영화 어땠어?” 유미: “난 재미있게 봤는데, 너는?” 나: “으응, 나도 오랜만에 영화 보니까 재밌었던 것 같아.” 유미: “그러게. 재밌었어~ 팝콘도 맛있었고!” 트레이와 컵을 반납하고선 영화관 밖으로 걸어나오자, 하늘에는 이미 새빨간 저녁놀이 펼쳐져 있었다. 유미: “그런데 말이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 “뭘?” 유미: “오늘 봤던 영화 주인공 말이야.” 사거리에 멈춰 선 우리는 방금 보았던 영화에 대한 감상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영화의 내용은 뻔하다면 뻔할 수도 있는, 사랑하는 이를 죽여버린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다만, 조금 특별한 게 있다면 주인공이 사랑했던 이가 사람이 아닌 AI라는 점 정도. 나: “글쎄…… 영화라서 감정을 조금 격하게 표현한 건 아닐까?” 유미: “왜? 자기가 사랑하던 존재가 억울하게 죽어버렸는데, 그럴 수도 있지 않아? 그렇다고 알아주는 사람이나 위로해주는 사람도 없고, 법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나: “그래도 그건 AI잖아. 예를 들자면, 자기가 엄청 아끼던 인형을 누가 고장 내버렸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죽이려 하는 게 정당화 되지는 않을 거 아냐.” 유미: “넌 AI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야?” 나: “응, 아마도.” 유미: “하지만 고도로 발달한 AI라면 충분히 사람과 대화도 나눌 수 있고, 감정도 교감할 수 있지 않을까?” 나: “인공지능에게 감정이 생긴다니, 잘 상상이 안 가는데…….” 유미: “사람의 감정은 결국 뇌의 화학적 반응이라고~ 고도로 발달된 인공지능에게도 그런 식으로 감정을 덧씌워 줄 수 있게 될 날이 올지도 몰라?” 나: “아직도 안 오긴 했지만.” 그런 말을 혼잣말처럼 하고선, 나도 모르게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유미는 내 짧은 말의 영문을 잘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며 신호가 바뀐 사거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나: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인공지능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유미: “그런가? 그럼, 이야기를 조금 바꿔서. 너는 인공지능이든 뭐든, 좋아하는 이가 다른 사람에 의해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면 그 복수는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나: “그런 건 싫어.” 유미: “왜? 설령 법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 “영화 마지막 부분에도 나왔잖아. AI가 남겨둔 메시지에서.” 유미: “하긴, 감독의 의도도 그런 쪽이었겠지?” 나: “으응, 결국 복수도 미완성으로 끝나버렸으니까.” 영화에 관련된 이야기는 이쯤 하면 된 건지, 유미는 잠시 붉은색 저녁놀을 바라보며 말없이 횡단보도를 걸었다. 흑과 백이 교차되는 횡단보도가 끝나고, 단색의 패턴으로 이루어진 보도블럭이 뒤를 잇는다. 서로의 길이 엇갈리기를 한 블록 정도 앞두고, 나는 별생각 없이 이번에도 혼잣말처럼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나: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뭘까?” 유미: “으응……?” 위를 향하고 있던 유미의 시선이 위치를 바꾸어 나를 향한다. 나: “정말 네가 말했던 것처럼 그것도 단순히 뇌의 화학적 반응이려나.” 유미의 생각을 묻듯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을 땐, 그녀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건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뭔가 깊게 생각할 때마다, 유미는 눈동자를 깜빡거리곤 했었는데. 오랜만이었다.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져있는 유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건. 물론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고민에 잠겨있던 유미는 주변을 둘러보며 내게 말을 건넸지만 말이다. 유미: “어라, 벌써 여기까지 왔었네.” 멋쩍게 웃으며 “내일 봐”라는 인사와 함께, 유미는 나와는 반대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내일 보자는 인사도 당분간은 못하겠구나. 붉은색 노을이 서서히 색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한여름에 접어든 거리는 변함없이 후텁지근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편의점에 들러 도시락을 고르면서야 나는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유령 소녀의 존재를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평소에 주로 저녁으로 먹던 도시락을 집어 들고 난 뒤에도, 도시락 코너 주변을 한참 동안이나 배회했다. 아무거나 괜찮다는 이야기를 수시로 하는 소녀였지만, 왠지 모르게 불편한 단어란 말이지. 고민하다 결국 내 것보다 아주 조금 더 비싼 치킨 데리야키 도시락을 고르고선, 컵라면 몇 개를 사들고는 편의점을 나왔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붉은색 저녁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도어락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평소와 같은 적막감이 나를 반겼다. 그런 적막감 틈새로,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익숙한 구석이 느껴지긴 했지만. 나: “어…… 음, 학교 갔다 왔어.” 내 인사가 어색하게만 느껴졌는지, 소녀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나: “뭐 하고 있었어?” 소녀: “망상 중이었어요.” 나: “무슨 망상?” 소녀: “정말로 사라지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요.” 나: “아, 그래…….” 소녀: “거짓말이에요. 배고파서 언제 오나 기다리고만 있었어요.” 나: “아, 맞다. 점심도 못 먹었겠구나. 미안, 뭐라도 미리 먹을 걸 챙겨 놨어야 하는 거였는데.” 소녀: “뭘요, 귀신이 매 끼니 다 챙겨 먹는 것도 좀 이상하잖아요.” 이게 소녀만의 유머 코드라면 적응하기 조금 난감할 것 같은데. 소녀는 내가 내려놓은 비닐 봉투에 들어있던 도시락을 꺼내 들더니, 내게 물었다. 소녀: “오늘 저녁은 도시락인가요?” 나: “으응,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소녀: “음…… 그럼 전 요걸로 할게요.” 소녀가 고른 것이 치킨 데리야키 도시락임을 확인하자, 나는 아주 약간의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녀: “제가 데워와도 되나요?” 나: “전자레인지에 3분. 아, 그 정도는 알고 있으려나.”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의 모습이 아침에 보았던 것과는 미묘하게 변한 것 같아서 그랬을까. 나는 도시락을 데우러 가는 소녀를 들키지 않을 정도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엇이 미묘하게 변했는지는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알아챌 수 있었다. 욕실 벽면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물기가 정답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집에 도착했을 때 느껴지던 익숙하면서도 익숙지 않은 향기란, 아마도 샴푸 냄새였나보다. 내가 쓰면 칙칙한 남고생 냄새밖에 나지 않을 샴푸일 텐데. 그리고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어도, 유령은 샤워를 하나 보다. 그렇다고 하면, 갈아입을 옷은……. 나: ‘…… 착한 생각, 착한 생각…….’ 대충 목덜미의 땀을 닦으며 세수를 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땐, 소녀가 막 탁자 위에 데워진 도시락을 올려 둔 뒤였다. 소녀와 함께 하는 두 번째 저녁 식사 시간은 다행스럽게도 어제보다는 훨씬 더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말문을 먼저 연 건 신기하게도 소녀 쪽이었다. 소녀: “학교에선 별일 없었나요?” 약간은 긴가민가한 투로 내게 질문을 건네는 소녀에게, 눈치도 없이 “으응, 별일 없었어.”라고 이야기한 건 내 실수가 맞다. 그렇다고 소녀에게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대답은 나와 똑같을 것이 뻔하겠지. 도시락을 다 비우기도 전에 서먹서먹하게 침묵 속에 빠지는 건 원치 않는 일이었기에, 나는 급히 소녀에게 떠오른 말을 아무렇게나 꺼냈다. 나: “아, 내일이 방학식이거든. 주말부터는 같이 다니면 되겠다.” 소녀: “세워둔 계획은 있나요?” 나: “일단 가까운 곳부터 찾아보려고.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곳이 B구역인데…… 가깝다곤 해도 가는데 열차로 두 시간 정도는 걸릴 거야.” 소녀: “그렇군요.” 도시락을 오물거리며, 한결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녀. 볼록해진 양 뺨이 들어갈 새도 없이 너무나도 맛있게 밥을 먹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 “미안, 저녁이 생각보다 늦어져서 많이 배고팠나 보네. 게다가 점심도 못 먹었고…….” 바쁘게 움직이던 소녀의 젓가락질이 잠깐 멈추고, 주로 도시락을 향해 있던 소녀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소녀: “앞으로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잠시 공허한 젓가락질 소리가 들려온 뒤, 소녀가 머뭇머뭇 내뱉은 이야기였다. 소녀: “…… 그쪽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야 할 존재를 위해 호의를 베풀어주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소녀는 이거라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거라는 얼굴을 내게 지어 보이고선, 다시 천천히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가벼운 웃음. 의미를 나조차도 알 수 없을 법한 흐릿한 미소가 내 입가에 서린다. 나: “왜, 유령한테 잘못 보였다간 사라질 때까지 해코지당할 수도 있는데.” 소녀: “…… 그럴 일 절대 없어요. 그리고 저 때문에 더 이상 신경 쓰이게 되는 건 원하지 않는걸요.” 그 웃음의 시작이 어떤 감정에서였는지는 여전히 아리송했지만, 어쨌거나 그 웃음의 끝이 머쓱함이었다는 것 정도는 기억이 나는 것 같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며 이부자리에 누우려는 나를, 소녀는 잠깐 낮잠을 자서 잠이 오지 않는다며 나를 기어코 침대에 눕히고는 자신은 바닥의 이부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는 소녀. 눈을 감았는데도, 소녀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시선 속에서 잠이 드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마냥 부담스럽게 느껴질 거라고만 생각했던 유령의 시선은, 어째 수면제처럼 나를 잠의 세계로 안내했다. 익숙하리만치, 그리우리만치 따뜻한 눈길이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고선, 잠들기 전과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소녀와 눈을 마주친다. 부스스한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며 뭐라 아침 인사를 건네려 속으로 고민하다, “좋은 아침.”이라는 평범한 인사를 건넸다. 그 뒤로는 소녀의 부탁대로 평소와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세수를 하고, 교복으로 갈아입고는,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해결한다. 아침 식사가 두 사람의 몫이라는 것만 빼면, 완벽히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 일과였다. 현관을 나서기 전, 소녀에게 건넨 “다녀올게”라는 인사가 어제보다는 한결 익숙하게 느껴진 것이 달라진 점이라면 달라진 점이겠지. 방학식은 평범하게 끝이 났다. 훈화 말씀이 너무 길어 도중에 어제 잠을 너무 푹 잤나 하는 후회를 잠깐 하긴 했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다.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간. 찬장에 컵라면을 넣어 두긴 했지만, 지금 집에 돌아간다면 소녀의 점심을 챙겨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미가 특별한 이야기만 꺼내지 않는다면……. 유미: “어, 오늘은 집에 같이 못 가겠다.” 나: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유미: “방학때 할 멘토링 때문에 잠시 교무실에 들러 봐야 할 것 같아서.” 복도를 걷다 말고, 유미는 휴대용 태블릿에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고선 내게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잠깐이라면 기다릴 수 있는데.” 유미: “아, 그게……. 조금 오래 걸릴 것 같아. 한 시간 정도? 기다리게 하는 건 조금 미안하니까, 먼저 가.” 나: “그럼 어쩔 수 없네.” 한 시간이라면, 아무래도 너무 늦겠지? 집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 아니 유령도 있고. 유미: “그럼, 방학 잘 보내~ 개학식 날 보려나?” 나: “글쎄, 가끔 마주치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학예제 준비한다며. 그럼 학교에서 종종 마주칠 것 같은데.” 유미: “아, 그렇겠다. 어쨌거나, 다음에 봐~” 유미는 언제나 그랬듯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복도 한편에서 내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유미가 교무실 쪽으로 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편에서 이쪽으로 슬그머니 걸어오고 있던 익숙한 학생 한 명이 눈에 띄었다. 현지: “아, 선배.”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어느 후배 여학생…… 이 누군지는 딱히 설명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다. 한쪽 손에 휴대용 태블릿을 쥐고 있던 현지는 그쪽 손을 내게 흔들어 보였다. 현지: “오랜만이에요~” 나: “오랜만이라니, 바로 그저께도 봤으면서.” 현지: “그 정도면 오랜만인 거죠.” 현지는 평소와 같은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나의 주변을 살폈다. 현지: “어라, 그런데 유미 언니는 어디 있어요? 항상 같이 하교했잖아요.” 나: “아, 유미는 오늘 방학 때 할 멘토링 때문에 잠시 교무실에 가봐야 한대서. 조금 늦을 것 같으니까 먼저 가라던데.” 현지: “그렇구나~”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현지. 태블릿을 주머니에 집어넣고선, 현지는 나의 옆을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하교가 한발 늦은 탓인지, 교문을 나오는 길에는 나와 현지 단 두 사람뿐이었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후텁지근한 열기가 피부를 스쳤다. 불쾌지수를 한껏 올리는 날씨라는 생각과 함께 옆을 돌아보았는데, 현지는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밝은 표정을 한 채였다. 나: “기분 좋아 보이네.” 현지: “그야, 오늘부터 여름 방학이니까요. 방학식 날만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나: “하긴, 고등학교 올라와서 첫 방학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현지: “선배는 방학인데 기분 안 좋아요?” 나: “기분? 으음…… 글쎄. 나는 그럭저럭. 학교 안 나가는 건 좋네.” 그러고 보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빨리 방학이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바랐었는데, 막상 이렇게 여름 방학이 시작하니 그리 와닿지는 않았다. 현지는 흘러가는 구름마냥 가벼운 발걸음을 사뿐사뿐 옮겼다. 나: “방학 때 특별히 계획해둔 일은 있어?” 현지: “선배 도와준다고 했었잖아요?” 나: “아니, 그런 거 말고. 혼자 특별히 하려고 했던 일이 있나 해서. 여행이라든가…….” 현지: “선배 도와주는 일 정도면 특별한 일이라구요~” 내가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볼 새도 없이, 현지는 다른 주제로 이야기의 화두를 옮겼다. 현지: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옆을 바라보려던 나의 시선은, 그런 이야기와 함께 옆을 돌아본 현지의 눈동자와 맞물린다. 현지: “그때는 선배가 저한테 그런 부탁을 했었잖아요. 그런데 이번엔 정반대로 선배가 그런 부탁을 받은 거네요.” 나: “부탁이라…… 듣고 보니 그렇네.” 그런 부탁이라면, 분명 그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 현지: “그래서, 귀신이랑은 조금 친해졌나요?” 나: “글쎄. 조금 익숙해지긴 한 것 같은데, 그 유령 여자애는 나랑 거리를 좀 두는 것 같아. 계속 자기는 신경 쓰지 말라면서.” 나의 이야기를 들은 현지는 마치 ‘그게 뭐예요’라고 이야기하는 듯한 얼굴로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현지: “처음 봤을 때 선배랑 똑같네요. 자기는 신경 쓰지 말라니.” 나: “그러게.” 현지: “어떻게 신경 안 쓸 수가 있어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향해 쿡쿡 웃음소리를 전하는 현지. 사거리 앞에서 멈춰서 건너편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게, 다시 한번 현지가 질문을 건넸다. 현지: “그건 그렇고, 뭐 좀 알아낸 건 있어요?” 나: “아니. 아직 알아낸 건 아무것도 없어. 이번 주말부터 자료에 나와있는 장소들을 찾아가 보려고 하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현지: “네에? 직접 찾아가 본다고요?” 나: “응, 그 유령 여자애가 뭔가를 떠올리려면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아.” 현지: “위험하지 않아요? 선배가 추려둔 자료에는 살인 사건 같은 것도 있잖아요.” 나: “그렇게 위험한 곳은 제쳐 두고, 일단은 화재 같은 사고부터 먼저 확인해 보려고. 못 찾으면 뒷일은 나중에 생각해보지 뭐.” 현지: “막무가내네요…….” 신호를 기다리며, 현지는 나를 약간은 못 미덥다는 눈치로 올려다보았다. 그런 못 미더운 나를 걱정이라도 하는 건지, 현지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조금 더 동그래져 있었다. 현지: “그럴 바에는 VR을 사용하는 게 낫지 않아요? 예전에 정리해 뒀던 자료엔 VR 관련 데이터도 들어있었잖아요.”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고, 횡단보도로 발걸음을 내디디려는 찰나, 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지와 나란히 횡단보도를 걸으며, 나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 “나도 그래 보려고 했었는데, VR 헤드셋이 작동하지를 않아서.” 현지: “VR 헤드셋이요? 고장 난 거예요?” 나: “글쎄, 유령이라 기기에 인식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현지: “으음…… 그런가요.” 현지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습관처럼 입술 근처에 손을 가져댔다. 현지 자신은 아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는 습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횡단보도의 끝자락에서, 현지는 입술에서 손을 떼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뭔가가 떠올랐는지 문득 내게 말을 건넸다. 현지: “아, 그런데 선배. 며칠 전에 올라왔던 뉴스 봤어요?” 나: “어떤 뉴스?” 현지: “이 근처에서 로봇들이 단체로 통신 불량이 되어 버린 거 말이에요.” 주머니에서 태블릿을 꺼내든 현지는 내게 뉴스를 직접 보여주려고 했는지 인터넷을 켜 뉴스를 검색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였지. 이틀 전, 오작동하는 로봇들 틈새에서 유령 소녀를 발견했던 곳이. 나: “아니, 뉴스는 못 봤는데. 아마 저쪽에서였나.” 뒤돌아보며 내가 가리킨 반대편 길목은 그때와는 달리 서너 명 정도의 사람들만이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인터넷 기사를 찾고 있던 현지는 의외라는 얼굴로 태블릿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고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현지: “어라, 어떻게 알고 있었어요?” 나: “그날 집에 가는 길에 봤어. 사람들이 모여 있길래 가봤더니 로봇들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오작동하고 있더라고.” 현지: “정말요? 전 미행에 정신이 팔려있느라 몰랐어요.” 내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며, 현지는 고개를 한 번 갸웃댔다. 그러다 잠시 나와 눈이 마주쳐 웃음을 슬쩍 흘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현지: “그런데 요즘 들어 백석시에서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하더라고요. 중앙 관제 센터에서는 전파 혼선이라고 발표하긴 했지만,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못 밝혀냈대요.” 나: “그래? 난 그제 거기서 처음 봤었는데.” 현지: “1년 전부터 기사로도 자주 올라왔었는걸요? 가끔씩 관제센터에서 로봇들과 연결이 끊어져서 로봇들이 실종되곤 한다면서요.” 나: “그런가. 그나저나, 1년 전이라면…….” 1년이라면, 거기까지다. 나의 온전한 기억이 손을 뻗을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고 해야겠지. 그 너머의 기억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또렷하다고도 할 수 없다. 애매모호한 경계선이라는 것이다. 내가 기억의 손을 뻗을 수 있는 곳인지, 그렇지 않은 곳인지……. 현지: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선배가 이야기한 그 유령이 이곳을 떠돌기 시작한 이후랑 딱 맞아떨어져요.” 나: “아, 그것도 그렇네.” 그러고 보니 그 여자애가 유령이 되어버린 것도 1년 정도 되었다고 했었지. 현지: “어라. 선배, 다른 짚이는 구석이라도 있어요?” 나: “아니, 짚이는 건 아니고. 이건 확실히 우연이겠지만, 내가 여기로 오게 된 뒤부터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해서.” 현지: “아, 맞다. 그것도 그렇죠. 하지만 선배가 초능력자는 아니니까요.” 나: “으응, 그렇지.” 장난처럼 지나가는 로봇을 향해 손을 쭈욱 뻗어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로봇이 이상한 행동을 한다거나 하는 일이 일어날 리는 없었다. 현지: “혹시,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아닐까요?” 나: “폴터가이스트 현상?” 현지: “네. 그 유령이 로봇들을 건드려서 이상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됐다던가…….” 나: “으음…… 듣고 보니…….” 현지는 그 유령 여자애와 로봇들의 이상 행동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 “으음…….” 현지: “뭔가 떠오른 거라도 있어요?” 나: “아, 그게…… 그 유령 여자애를 발견한 곳도 바로 거기였거든. 확실히 그 유령 여자애랑 연관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데…….” 분명 오작동하고 있던 로봇들 틈새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소녀가 걸어가고 있긴 했었지만, 그뿐이었다. 나: “하지만 그 애가 로봇에 뭔가를 하려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어. 오히려 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나 할까.” 현지: “직접 로봇을 건드리지는 않았다는 거네요. 그러면 유령의 존재가 전파의 혼선을 일으키기라도 하는 걸까요?” 나: “글쎄. 같이 다니다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현지: “아, 그렇겠네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현지. 현지: “뭔가 알아낸 게 생기면 바로 연락 줘요.” 나: “알겠어. 문자로 연락할게.” 아마 현지가 없었더라면, 나는 휴대용 태블릿에 문자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있지는 않았으려나. 유미와는 주로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는 편이었지만, 현지는 전화보다는 문자가 편하다는 쪽인 듯했다. 하긴, 말보다도 문자를 보내는 속도가 더 빠르니, 이상할 건 없지만 말이다. 걷다 보니 어느새 하굣길은 끝이 나 있었다.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건네려 고개를 옆으로 돌렸는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현지가 먼저 내게 말을 건넸다. 현지: “선배, 유령이랑은 계속 서먹서먹하게 지낼 거예요?” 나: “편해지는 것까진 가능할지 몰라도, 친해지기는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 손을 흔드는 것을 잠시 뒤로 미뤄두고, 나는 현관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현지: “정말요?” 나: “으응, 나를 부담스러워 하는 거 같기도 하고.” 나의 대답을 듣고서도, 현지는 여전히 더 물어볼 게 있다는 것처럼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현지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온 건, 그로부터 몇 초 정도 뒤의 일이었다. 현지: “그럼, 저랑 내기해요.” 나: “내기? 갑자기 웬 내기야.” 현지: “전 선배가 그 유령 여자애랑 친해진다에 걸게요.” 나: “그렇다고 내기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어딘가 현지답지 않은 과한 반응이라는 생각이 드는 참이었다. 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나를 조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바라보던 시선을 슬쩍 틀고서는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벼운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현지: “알겠어요. 그래도 나중에 뭔가 알아낸 게 생기면 꼭 연락 줘야 해요?” 나: “으응, 알겠어. 바로 연락 줄게.” 현지: “히, 그러면 그때 봐요~” 현지의 눈동자는 어느새 원래의 가벼운 빛을 띠고 있었다. 신신당부를 하듯, '꼭'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이야기한 현지는 내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선 길목 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라져가는 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가벼운 웃음을 지어 버렸다. 나: “다녀왔어.”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지만, 어째서인지 방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곧바로 소녀가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생각이 무색하게, 주변을 둘러봐도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방 안의 상태는 아침에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침대 위의 이불이 종이접기를 해 놓은 것처럼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는 것 정도. 나: ‘어디 갔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부엌도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소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했던 걸까. 걱정 섞인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하려는 찰나, 다행스럽게도 어디에선가 인기척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노랫소리. 물줄기 소리에 섞여 또렷이 들리진 않았지만, 분명 노랫소리였다. 나: “…….” 상황을 이해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점점 더 또렷이 들려왔다.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에 맞추어 연주되는 맑은 하이톤의 허밍 소리. 내 걸음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욕실 문 앞이었다. 욕실 안에서는 가벼운 콧노랫소리와 반주처럼 들려오는 샤워기의 물줄기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분명 소녀는 이 안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 거겠지. 소녀는 내가 집에 들어온 것을 여전히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지,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에 맞추어 계속 허밍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잠시 뇌정지가 온 탓에, 문 앞에 서서 멍하니 몇 초 정도 소녀의 허밍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그렇다고 이 앞에 계속 서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나는 욕실 안에 있을 소녀에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보았다. 아무 말 없이 방에 있다간 또 무슨 난감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말이다. 나: “저기…… 안에 있어?” 나의 목소리가 욕실 안의 소녀에게 확실하게 전해졌는지, 흘러나오던 노랫소리가 뚝 끊어졌다. 욕실에서는 샤워기에서 떨어지고 있을 물줄기 소리만이 눈치 없이 들려올 뿐이었다. 소녀: “드, 들어오면 안 돼요!” 나: “아, 안 들어갈 거거든?” 곧이어 당혹스러움이 잔뜩 묻어있는 소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소녀: “그, 금방 나갈 거예요…….” 물에 젖어 흐물흐물해진 것처럼 떨리는 소녀의 목소리가 콩알만한 크기로 들려왔다. 나: “으응, 알겠어…….” 심호흡을 크게 내쉬고선, 나는 발걸음을 돌려 침대 위로 몸을 털썩 누였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예상 밖의 상황에, 내 몸은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머릿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욕실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모두 멎자, 정말 심장이 뛰는 소리만이 귓등을 때렸다. 눈을 떴을 땐, 소녀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 있었다. 소녀: “어쩐 일이에요? 이렇게 일찍…….” 샤워를 마치고 나타난 소녀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것 없어 보였다. 똑같은 복장,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 다만, 급히 욕실을 나왔던 건지, 소녀의 덜 마른 머리카락에 맺혀있던 물방울들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 “그야, 어제도 오늘이 방학식이라고 이야기했고. 일찍 마친다고 말했었잖아.” 소녀: “아, 맞다. 그랬었죠…….” 소녀는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선, 물기가 남아있는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좀 더 천천히 돌아올 걸 그랬나. 괜히 머쓱해져버려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만약을 가정한 상상 하나가 내 머릿속에 떠올라 버린다. 만약 내가 조금 더 늦게 집에 돌아와 지금쯤 도착했다면……. 나: “…….” 아까보다 훨씬 더 난감한 상황 하나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리고 누가 그 상상 속에 알코올을 잔뜩 타놓기라도 한 건지, 술에 취한 것처럼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버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소녀: “……?” 갑자기 붉어진 내 얼굴을 보고선 의아한 눈치를 보이는 소녀.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이 나의 마음을 읽어내기라도 할까 봐, 나는 대뜸 소녀를 향해 아무 말이나 되는 대로 말해 버렸다. 나: “그, 그나저나, 몰랐네. 유령도 샤워를 해야 하는 줄은.” 소녀: “그, 그건…… 기분의 문제라고요.”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이번엔 소녀의 얼굴이 취기가 도는 것처럼 약간 붉게 물든다. 실수한 것 같다. 정말 아무 말이나 꺼내버렸으니 말이다. 나: “어……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괜찮겠어?” 소녀: “그, 그,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거든요.” 감정이 꽤나 많이 섞인 투로, 소녀는 내게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나는 잠시 숨을 돌린 뒤에서야 소녀에게 점심 식사를 제안할 수 있었다. 혹시나 방금 전의 일로 기분이 틀어져 자기는 됐다는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소녀는 배가 고팠던 건지 나의 제안을 간단히 승낙했다. 냉장고에는 언제 사 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두 명이 먹을 정도의 스파게티 재료가 남아 있었다. 이제 정말 냉장고에 남아있는 식재료들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기에, 조만간 편의점이 아닌 대형 마트에 한 번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1인분 몫의 음식을 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내 손을 거쳐 요리된 스파게티는 어딘가 엉성해 보이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조금 과하게 익은 티가 없잖아 나는 스파게티를, 소녀는 군말 없이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접시를 비우고 나서는, 그녀 특유의 목소리로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것도, 소녀는 잊지 않고 있었다. 접시를 정리하고는 빈 탁자에 앉아, 소녀와 나는 식사를 하며 나누었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소녀: “내일 바로 나갈 거라고 했었죠?” 나: “응, 그러려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잖아.” 태블릿을 꺼내든 나는 소녀에게 지도를 확인시켜 주며, 다시 한번 세워두었던 계획을 설명했다. 나: “돌아오는 건 저녁쯤이면 될 것 같으니까, 세 군데 정도 돌아다녀 볼 거야.” 소녀는 지도에 표시된 곳을 확인하고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 “상가 건물이랑, 주택가 쪽이네요. 전에 이야기한 화재 사고가 일어난 곳들이죠?” 나: “맞아. 뭐…… 하루 만에 뭔가를 알아내기는 힘들겠지만.” 소녀: “그래도 하루에 세 군데씩이라면, 얼마 안 걸리지 않을까요?” 나: “아냐. 이번에는 가까운 곳이라 그런 거고, 지도에 정확하게 위치가 안 나오는 곳도 있어서. 방학 내에 여기 나온 곳들을 다 돌아보려면 조금 아슬아슬할지도 몰라.” 소녀: “그런가요.” 소녀는 태블릿에서 눈을 떼고선 나를 바라보며 대답을 건넸다. 나: “여기서 B구역까지 가는 데엔 두 시간 정도 걸리니까, 아침 일찍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소녀: “그럼 오늘은 일찍 자 둬야겠네요.” 이러고 있자니, 꼭 여행 계획을 짜는 것만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이 여행이 소녀에게 시한부 인생을 선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유쾌하다고는 생각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미묘한 생각에 잠겨가며, 소녀의 얼굴을 힐긋 바라보았다. 소녀는 그녀 나름대로는 편하다고 할 수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녀의 표정을 따라하려 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소녀는 유령이다. 이미 죽어 영원한 안식을 가졌어야 할, 망자인 것이다. 이름조차 없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존재. 그런데 어째서 그런 존재가 나의 눈앞에 나타나, 내 눈에만 보이게 된 걸까? 누군가가 소녀를 영혼이라는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어야만 한다면, 그게 왜 하필 내가 된 걸까? 답을 찾기엔 너무나도 어려운 물음들이었다. 소녀를 성불시킬 수 있을 때쯤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길 비는 수밖에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도착한 터미널에는 다행스럽게도 그리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는 않았다. 터미널에 도착한 소녀는 내 옆 의자에 앉아 첫 열차가 오기만을 고개를 슬쩍 숙인 채 기다렸다. 그래도 그리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아서인지, 소녀의 얼굴은 살짝 긴장한 선에서 그쳐 있었다. 이른 주말 아침의 첫 열차는 제법 한산해서, 소녀는 별걱정 없이 나의 옆자리에 몸을 앉힐 수 있었다. 한 시간 반 정도 열차를 타고 B구역 터미널에 도착한 우리는 터미널 가판대에서 샌드위치로 간단히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고는 밖으로 걸어 나왔다. A구역에서는 이 시간대면 터미널에 잔뜩 사람이 몰려 있을 텐데, 이곳은 여전히 한산하다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사람들이 듬성듬성 보일 뿐이었다. 소녀: “제법 멀리 온 것 같은데요.” 주변을 둘러보던 소녀는, 익숙하지 않은 곳이라는 뉘앙스로 넌지시 말을 꺼냈다. 나: “B구역이니까, 조금 멀리 오긴 했지. 혹시 여긴 와 본 적 있는 곳이야?” 소녀: “아뇨. 여기저기 돌아다니긴 했지만, 이렇게 멀리까지 와 본 적은 없어요.” 소녀는 바닥을 향해 고개를 떨구고는, 이젠 익숙한 눈치로 내 손을 잡았다. 발걸음을 내디디려다 말고, 소녀는 문득 아까 전의 이야기를 정정이라도 하려는지 무언가 말을 덧붙였다. 소녀: “제가 기억 못 하고 있는 걸 수도 있겠지만요.” 나: “으응…….” 소녀의 이야기가 약간은 자조적인 투로 들린 탓에, 나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손에서는 소녀의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나쁘지 않은 감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마음에 드는 감촉이라는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소녀: “원래 있던 곳보다 많이 허름해 보이는 거리네요.” 손을 맞잡은 채 말없이 나의 발걸음을 따라오던 소녀가, 문득 주변을 둘러본 감상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소녀의 말대로였다. 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마치 열차를 타고 십여 년 정도를 거슬러 올라간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나: “뭔가 떠오르는 건 없어? 왠지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 풍경이라든가.” 소녀는 나의 말에 슬쩍 고개를 들어 다시금 주변을 훑어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애매모호한 대답만을 건넸다. 소녀: “글쎄요.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묘한 어감의 단어라고 생각하며, 나는 소녀의 말을 두어 번 정도 되뇌었다. 바로 옆에 보이는 중학교 운동장에는 소녀의 또래로 보이는 학생들이 공을 차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반 대항 축구 경기라도 열린 건지, 그곳에는 축구를 하는 남학생들을 응원하는 여학생들도 더러 보였다. 옆을 돌아보자, 소녀도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원래라면 너도 저런 학생들 틈에 있어야 했을 텐데.” 소녀: “그러게요. 만약 오늘이 평일이었다면, 다른 사람들은 저를 보고선 불량학생인 줄 알았을 거예요.” 나: “그럴지도 모르겠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운동장의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던 소녀가 살랑살랑 불어오는 한여름의 바람에 머리칼을 슬쩍 흩날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소녀: “혹시 모르죠. 지금쯤이라면 저도 고등학교에 들어갔을지도.” 그 말을 듣고선, 나는 내가 소녀의 나이에 관해 간과했던 점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나: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소녀: “뭐, 죽어버린 지금에 와서야 무의미한 가정이지만요.” 다시금 고개를 돌려 운동장의 학생들을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그녀답다고 할 수 있는 음울함이 희미하게 어렸다. 소녀: “유령이 되고 난 뒤엔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껍데기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까. 전 지금 두 살짜리 어린애인 거나 다름없어요.” 내가 덧붙일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애초에 이미 죽어버린 유령에게 위로가 될 말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렇게 10분 정도 더 거리를 걸어 내려와서야 나와 소녀는 목적지로 삼았던 상가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터미널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8층짜리 상가 건물은 주변의 건물들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홀로 외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입구 쪽으로 다가가자, 그곳에는 잉크가 바랜 ‘임대 문의’ 포스터가 부적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당장 철거만 되지 않았다뿐이지, 꼭 폐건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 “들어가도 되는 걸까요?” 나: “그렇지 않을까? 문도 열려 있고, 상가 건물이니까 안에 영업하고 있는 가게가 있겠지.” 그런 이야기와 함께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1층 로비에서는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분위기만이 나와 소녀를 반겼다. 빛바랜 층별 안내도, 깨진 LED 전구, 먼지가 잔뜩 묻어있는 엘리베이터 버튼……. 이 건물에는 오직 나와 소녀, 아니, 어쩌면 오직 나뿐인 것 같았다. 소녀: “조용하네요.” 주변을 둘러보던 소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 “그러게.” 벽면에 부딪힌 나의 목소리가 묘한 울림을 이룬다. 단지 나에게 전해질 뿐인 소녀의 목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울림이었다. 먼지 묻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이내 엘리베이터의 작동음이 들려왔다. 혹시나 고장 난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소녀: “화재가 건물 전체로 번졌다고 했었죠?” 나: “으응.”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소녀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소녀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불길에 그을린 새까만 자국이 불길의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주변의 고요한 분위기에 물들기라도 한 건지, 더 이상의 이야기가 오가지는 않았다. 단지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릴 뿐. 바라보고 있던 숫자가 드디어 1로 바뀌고, 불안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불규칙한 주기로 천장의 전등이 명멸하고 있었기에 타도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소녀는 그런 걱정이 들지도 않는지 먼저 엘리베이터에 탄 뒤였다. 소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나는, 6층 버튼을 누르고선 막 명멸하는 조명을 바라보며 소녀에게 말했다. 나: “조금 걱정되지 않아?” 소녀: “걱정이라뇨?” 나: “왜, 이렇게 조명도 깜빡이고, 문 여닫히는 소리도 엄청 불안했잖아.” 소녀: “네……?” 문이 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힘겹게 닫힌다. 그 순간마저도 격렬하게 명멸하는 조명 아래에서, 고개를 한 번 갸웃대는 소녀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비춰진다. 나의 불안함이 현실로 다가온 걸까. 명멸의 주기가 점점 빨라져 가던 조명은, 문이 닫힘과 동시에. 주변을 어둠으로 삼킨다. 나: “…….”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다. 마구잡이로 버튼을 눌러댔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기 시작해, 숨을 거칠게 내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살려주세요’라거나, ‘도와주세요’라는 말 한 마디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난잡하게 떠오르는 생각들은 그 어느 것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숨이 막혔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아득한 감각. 그 감각에 휩싸인 나는 마음속으로 살려 달라는 무언의 아우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아우성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곧이어, 어디론가 추락하는 듯한 감각이 나를 덮친다. 뭐지? 이대로, 이대로……. 소녀: “왜 그래요?” 가쁜 숨소리 사이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베이터는 3층에서 문이 열린 채 멈춰 있었다. 소녀는 엘리베이터 벽면을 바라보며 숨을 가다듬고 있던 나의 손을 잡고선 바깥으로 부축해 주었다. 소녀: “폐소공포증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바깥으로 나온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내게, 소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쿵쾅대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고는, 나는 뒤를 돌아 엘리베이터를 힐긋 바라보며 소녀에게 물어보았다. 나: “방금,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소녀: “아무 일도 없었어요. 조명이 깜빡이지도 않았고, 이상한 소리 같은 것도 들린 적 없는걸요.” 나: “…….” 다시 한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리고 내부의 모습이 보였다. 소녀의 말대로 불안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조명이 깜빡이지도 않았다. 방금 전의 감각은, 말 그대로 착각이었던 것뿐이었을까. 나: “몰랐는데, 그런가 봐.” 소녀: “몰랐다고요?” 나: “으응, 몰랐어.” 그러고 보니, 유미와 함께 다닐 때도 항상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했었지. 영화관에서도, 예전에 같이 갔었던 레스토랑에서도. 그래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분명 예전에는 이런 증세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런 증상은 내가 아닌, 이 몸의 원래 주인이 갖고 있었던 것이었으려나.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나: “…… 계단으로 올라가도 될까?” 소녀: “그렇게 해요. 바로 움직여도 괜찮겠어요?” 나: “으응, 괜찮아.” 소녀에게 애써 괜찮아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선, 나는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상구라고 적힌 안내등 아래로 연결된 계단 역시,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분위기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을 반쯤 올라 5층에 다다르려 할 때쯤, 옆에서 나란히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 있던 소녀가 문득 옷깃을 잡아당겼다. 소녀: “저기, 뭔가 싸늘한 느낌 들지 않나요?” 나: “싸늘한 느낌……? 글쎄, 오히려 좀 후텁지근하지 않나.” 오히려 냉방이 안 되어 조금 덥다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였는데. 소녀의 의아한 물음에, 이번엔 내가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소녀: “…… 그러게요. 뜨거워요.” 그런 말과 함께, 소녀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추었다. 옆을 돌아보자, 소녀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녀: “제가 볼 수 있는 건, 미래의 죽음뿐만이 아니었나 봐요.” 혼잣말처럼, 곧바로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소녀: “보여요.” 나: “보이다니? 뭐가?” 소녀는 나의 손을 슬며시 붙잡았다. 소녀: “죽음의 색이요.” 소녀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나도 시선을 옮겨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그곳은 아무것도 나타나 있지 않은 허공일 뿐이었다. 소녀: “화재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색은, 이런 색이었네요.” 소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계단을 다시 걸어 올라갔지만, 그녀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는 것쯤은 간단히 알 수 있었다. 유령은 땀 같은 것도 흘리지 않는 걸까. 나의 손을 붙잡은 소녀의 손에서는 싸늘한 한기만이 느껴졌다. 애초에 생각했던 6층에 도착하자, 형용하기 힘든 공허함이 나와 소녀를 반겼다. 나: “아무것도 없네.” 화재의 흔적을 지워내기 위해서인지, 벽에 잔뜩 발린 시멘트에 반사된 나의 목소리가 제법 오랫동안 귓가를 울렸다. 소녀는 내 손을 놓고는 한 걸음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더니, 아까처럼 허공을 빤히 바라보며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번에도 소녀의 목소리는 울림 없이 나의 귓가를 스친다. 소녀: “여기였나 보네요. 그 사진관이 있었던 곳이.” 나: “그러게. 지금은 사진관을 정리한 것 같아 보이네.” 소녀: “다른 가게들도 그런 거겠죠? 그 화재 이후에 이 건물에서 모두 방을 뺀 모양이네요.” 하나도, 남김없이. 조금 신기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던 차,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소녀: “이쪽 방화벽 너머로 넘어온 불길이 통로를 가로막아서, 사진을 찍던 여학생과 남학생…… 아마 둘은 남매인 것 같네요. 그렇게 둘이 불길에 갇혀 구조되지 못했어요.” 소녀: “사인은 화재 연기로 인한 질식사. 하지만 시신은 사인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겠죠.” 허공을 응시하던 소녀가, 마치 처방을 내리는 의사처럼, 여기서 죽었던 또 다른 소녀의 사인을 차분히 읊조렸다. 소녀: “그리고…… 그리고…….” 내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좇는 소녀의 눈동자. 엘리베이터에서 보았던 깜빡이는 조명처럼, 소녀의 눈동자가 명멸했다. 미간을 찌푸려 명멸하던 눈동자를 감아버린 소녀가 머리를 움켜쥐고는 입술을 깨문다.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무언가를 애써 떠올리려는 듯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았다. 소녀: “이런 기분, 처음이 아닌 것 같아요.” 얼마 정도가 지났을까, 오랫동안 침묵에 잠겨있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소녀였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명 확신이 느껴졌다. 소녀: “느껴본 적 있는 것 같아요. 이 여학생이 눈앞에서 보았던 광경도, 죽기 직전 느꼈던 끔찍한 감각도, 소름 끼치는 기분도…….” 나: “그렇다는 건…….”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다른 곳을 살펴보다 보면 더 기억이 날지도 모르겠어요.” 묘했다. 어쩌면 방학이 끝날 때까지도 소녀의 죽음에 관한 단서조차 잡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이렇게나 간단히 단서에 한 걸음 가까워질 수 있게 되다니. 이런 게 말로만 듣던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걸까. 나는 태블릿을 펼쳐 들고는, 경로를 수정하기로 했다. 원래라면 그다음으로는 교통사고가 일어났던 근처 역을 확인하러 가려 했지만, 열차로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에 다른 화재 사고의 현장이 있었다. 나: “그럼, 여기로 먼저 가봐야겠다.” 소녀: “그렇게 해요.” 발걸음을 서두르려는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자, 심장 한쪽에서 묘한 감각이 따끔거리며 피어오름을 느꼈다. 그런 감각이었다. 오랫동안,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내가 항상 느껴왔던 감각. 그 감각을 구체화하려 애쓰며 역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를 걸려 찾아간 장소에서 알아낼 수 있었던 건,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게도 상가 건물에서 알아냈던 것과 별다른 점이 마땅히 없는 사실들이었다. 화재가 일어났던 장소는 C구역에 위치한 자그마한 구립 도서관이었다. 이번에도 소녀는 초점을 잃은 듯한 얼굴로 도서관 안쪽을 이리저리 살폈지만, 긴가민가한 반응만을 보일 뿐이었다. 다만 한 가지, 소녀는 아주 조금 더 또렷이 자신이 겪었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수확이라면 수확이겠지만 말이다. 나: “그나저나, 가장 먼저 되돌아온 기억이 그런 거라니, 조금 그렇네.” 도서관에서 나와 다음 장소로 향하기 위해 역으로 걸어가며, 나는 소녀에게 조금 멋쩍은 투로 말을 꺼냈다. 소녀: “쓸데없는 기억이 떠올라 방해가 되는 것보단 낫잖아요.” 나: “아, 그런…… 가?” 소녀: “어차피 사라져야 하는데, 다른 기억들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에요.” 바닥과 나의 얼굴 사이, 어중간한 곳을 바라보고 있던 소녀는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나와 그녀 사이에 벽을 치듯 반응할 뿐이었다. 나: “하지만 네가 누구였는지 정도는 알고 싶지 않아?” 소녀: “…… 글쎄요.” 나: “친한 친구는 누구였는지, 가족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애매한 곳을 바라보고 있던 소녀는 조심스레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바닥을 향하고 있어 머리카락에 가려있던 얼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까부터 소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나의 눈동자는 필연적으로 그녀의 시선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소녀: “…… 그런데 말이에요. 저랑 이렇게 계속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 않을까요?” 나: “으응…… 아, 그렇겠네. 그렇지만 다 모르는 사람들이고. 별로 상관은 없는걸.” 함축된 의미도, 내재된 의도도, 그 무엇도 없는 단순한 말 한마디였지만, 어째서인지 오랜만에 나에게 향했던 소녀의 시선이 차가운 색으로 물든다. 자신도 저들처럼 그저 스쳐 지나가는 행인 같은 존재일 거라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왠지 그런 표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아, 그나저나 많이 걸어서 그런가, 되게 덥네. 그렇지 않아?” 소녀: “조금 덥긴 하지만, 전 괜찮아요.” 화제를 다른 곳으로 급히 돌리고 싶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때마침 타이밍 좋게도 근처에 있던 자판기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 “저기 자판기에서 뭐라도 하나 사서 마시면서 가자.” 소녀: “좋을 대로요.” 자판기에서 음료수 두 캔을 사서는 하나를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소녀는 “감사합니다.”라는 짤막한 감사 인사와 함께 내가 건넨 캔 음료를 받아들었다. 차가운 감각이 목 끝에서 머릿속까지 전달되고, 더위에 무뎌져 있던 사고 회로가 제 기능을 되찾기 시작한다. 아마 가장 적은 비용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이라는 건, 이를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나: “아, 그나저나 네가 정말 화재로 죽은 거라면, 왜 유령인 채로 남아 이곳을 떠돌아다니게 된 걸까?” 소녀: “글쎄요. 어쩌면, 화재 현장에서 죽음을 거부해야 할만한 무거운 이유가 있었던 걸지도 모르죠.” 캔 음료를 홀짝이며, 나는 소녀와 다시금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 “그럼 방금 도서관에서 들었던 이야기랑 비슷한 걸 수도 있겠네.” 소녀: “비슷하다뇨?” 내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는 못했는지, 이내 소녀의 되묻는 듯한 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캔 음료를 한 모금 더 삼켰다. 혀끝에는 달큰한 복숭아 향이 감돈다. 나: “네가 도서관에서 봤던 그 여학생. 다른 초등학생들을 대피시켜 주다 자기는 미처 화재 현장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고 했잖아.” 나: “그러니까…… 너도 그 여자애처럼 누군가를 도와주려 했지만, 어쩌다 보니 그러지 못해서 그 일이 미련으로 남아있다던가.” 소녀: “정말 그런 이유에서일까요.” 나: “음…… 일단은 추측일 뿐이지만. 뭐, 네가 기억을 되찾아서 미련 가질 만한 일이 뭐였는지 알아내는 게 제일 정확하겠지.” 소녀: “그렇겠네요.” 당연한 이야기에, 소녀도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적지근한 바람이 마주 보는 방향에서 불어왔다. 빈 캔을 손에 쥐고 고개를 떨어트린 채 걸어가던 소녀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려, 나는 머리칼 사이로 드러나는 그녀의 얼굴을 잠깐씩 바라볼 수 있었다. 세 번째로 발걸음이 닿은 곳은 C구역 변두리에 위치한 상점가였다. 상점가라 사람이 제법 북적일 거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나와 소녀는 한적한 상점가 거리를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백석시 A구역을 벗어난 적이 없어서 그런지, 도시 외곽지역의 분위기는 아무래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표시되던 지도 어플리케이션도 도시 외곽지역을 향해 갈수록 점점 간략한 정보만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나: “이 근처인 것 같은데…….”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는, 늘어선 가게들과 지도를 번갈아 바라보던 나의 눈길이 한 가게에 고정된다. 나: “음식점이네.” 면 종류의 음식을 주로 하는 식당으로 보였다. 자료에 나타난 주변 모습도 완벽하게 일치했다. 무작정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나는 소녀에게 제안을 건넸다. 나: “마침 배도 고픈 참일 텐데, 이참에 같이 식사도 해결하는 건 어때?” 소녀: “저도 같이요?” 나: “으응, 마침 식사 시간도 아니라 식당 안에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소녀: “으음…… 저야 뭐, 아무래도 좋아요.”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문 끄트머리에 달려있던 차임벨이 찰랑찰랑 울리며 나와 소녀를 반겼다. 나를 제외하고는 식당에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소녀는 곧장 눈을 찡그렸다. 이번에도 싸늘한 죽음의 감각이 소녀를 덮친 모양이었다. 입구 근처 자리를 잡고선, 카운터 겸 주방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노파에게 음식을 주문했다. 혼자서 2인분 치의 음식을 시키면 이상하게 바라보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는데,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는 듯 노파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나의 주문을 받아들였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나는 소녀와 이곳에서 있었던 사고에 대해 자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 “어때?” 소녀: “글쎄요. 조금 다른 느낌이에요.” 나: “다른 느낌이라니? 어떤 부분에서?” 소녀: “간단히 말하자면, 사인이 다른 거죠.” 나: “그래? 여긴 그냥 화재 사고라고만 적혀 있었는데.” 태블릿을 켜 저장해 두었던 자료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자료에는 이보다 더 간단할 수 없는 문구로 ‘C구역 외곽의 상점가에서 일어난 화재 사고로 16세 A양이 목숨을 잃었다.’라는 정보만이 쓰여 있었다. 소녀: “화재 사고이긴 하지만,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폭발 이후에 생겨난 파편에 의한 쇼크사인 것 같아요.” 나: “폭발?” 소녀: “네. 아마 옆 건물에서부터 시작된 폭발이었나 봐요. 하필 그때 밖으로 나오려다 그만, 전신에 파편을 뒤집어쓰게 된 거죠.” 나: “그렇구나. 엄청 급작스러운 사고였던 거네.” 소녀: “그런 셈이죠.” 소녀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옆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때마침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어느새 주문했던 음식을 주인 할머니께서 내어오고 있었다. 나: “아, 감사합니다.” 익명: “저기…… 학생, 혹시…….” 그때였다. 나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노파가, 식탁에 음식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익명: “우리 민주 이야기하고 있는 거…… 맞는가?” 갑자기 주변의 시간이 얼어붙은 듯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어떤 대답을 꺼내야 아무렇지도 않게 이 상황을 무마할 수 있을까? 에어컨을 그리 세게 틀어놓지도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오싹오싹한 한기가 머리를 맴돌았다. 나의 사고회로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듯한 냉랭한 감각이었다. 나: “아, 하하…… 네, 맞아요.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였었거든요.” 익명: “아이고…… 우리 민주 친구였구만…… 그랬구만…….” 나: “네에. 그런데 제가 중간에 멀리 전학을 가는 바람에, 소식만 들었어요. 오랜만에 들렀다가, 기억이 나서 다시 찾아와 본 거예요.” 민주라고 하는구나. 사고로 목숨을 잃은 그 여학생의 이름. 심장 한구석에 무겁게 자리 잡은 죄책감이 나를 쿡쿡 찔러댔지만, 어쩌겠는가. 이정도는 감수하는 수밖엔……. 익명: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말혀…… 천천히 먹다 가그레.” 1년이라는 시간은 아무래도 그때의 기억을 지우기엔 부족한 시간이었을까. 노파는 연신 작은 목소리로 민주라는 이름을 되뇌며, 카운터 쪽으로 느린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 저 노파의 손녀가 민주라는 여학생이었던 거겠지. 소녀: “저기 봐요. 저 사진이 그 민주라는 여자앤가 봐요.” 옆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가 얼어붙어 있던 시간을 녹여 흘러가게 한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계산대 한쪽에는 소녀의 말대로 나무로 된 사진틀에 한 여학생의 사진이 꽂혀 있었다. 카운터로 향한 노파는 사진틀 속에 멈춰 있는 시간을 지그시 응시했다. 언뜻 보이는 사진 속의 여학생은 덧없어 보일 정도로 행복한 얼굴을 한 채였다. 차림새도, 얼굴도, 분위기도, 확실히 소녀와는 달라 보이는 생김새의 여학생이었다. 사진 속의 소녀에게 정신이 팔려서였을까. 노파는 내가 2인분 치의 음식을 시켰다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저 우리가 음식을 먹는 동안, 홀로 조용히 슬픔을 삼킬 뿐. 소녀: “맛있네요.” 국수를 오물거리며, 소녀는 그런 반응을 보였다. 주인 노파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 내가 식사를 마치고 계산까지 끝낸 뒤의 일이었다. 가게를 걸어 나오는 나의 등 뒤로 접시를 정리하는 노파의 의아한 눈치가 느껴졌다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는 가게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장 후텁지근한 여름의 열기가 나를 맞이했다.